비와 상념
비와 상념
무더위를 한 김 식히려는 듯 비가 내린다.
오랜만에 목말라했을 수목들이 흡족하게 빗물을 마시는 듯하다.

우리 집 화초 녀석들도 기분 좋은 색깔을 띠며 활기를 되찾고 있다.
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들이친 비를 맞고 만족스러운 윤택함을 뽐내는 밴자민 나무를 보니, 덩달아
마음이 뿌듯해진다.
우리는 늘 물과 가까이 살기에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.
이번 비가 언제 또 내릴지 모르니, 지금 실컷 마시고 만족했으면 좋겠다.
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생태적인 지혜를 습득하는 너희들의 모습이 새삼 대견하다.
하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아쉬움과 후회가 떨떠름하게 남아 있다.
몽환적인 상념이 집요하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.
창가에 세차게 내리쳤다가 조용해지기를 반복하는 빗소리가 모질게만 느껴진다.
이 비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.
그 틈새로 배고파했을 딸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.
딸의 전화
딸은 몇 달 전 독립했다.
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는 역력한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.
퇴근길, 서울 근교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집에 들러 엄마의 집밥을 먹고 싶다는 딸은 말한다.
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지만, 그 속에 숨은 엄마 밥에 대한 간절함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져
내 마음 한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.
"엄마, 집밥 먹고 싶어."
하필이면 나는 밖에 있었다.
"엄마 지금 집에 없어."
이 말이 벽을 타고 힘없이 흘러내렸다.
아파트 커뮤니티센터에 도착한 지 10분 밖에 되지 않았다는 변명은 무력하기만 했다.
잠시 정적이 흐르고, 아이의 맥 풀린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.
'집밥이 그리웠구나.'
기대가 컸던 만큼 아이도, 나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.
고작 10분 거리인데,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차려주지 못한 미안함이 커다란 눈덩이처럼 내 마음을 짓눌렀다.
미안함과 그리움
늦은 시간 집에 돌아왔지만 딸은 이미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.
어젯밤이 지나고 맞이한 아침, 빗줄기는 여전히 씁쓸함을 실어 나른다.
이 비에 내 상념까지 씻겨 내려갔으면 좋으련만, 빗소리는 그저 둔탁하게 내면을 두드린다.
어느덧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속삭인다.
'이 비가 엄마처럼 지친 내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'라고 말이다.
기다림과 약속
집밥과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며 응석 부리는 딸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.
성인이 되어 독립했으니 알아서 잘 챙겨 먹겠지 싶으면서도, 생각의 끈은 좀처럼 매듭지어지지 않는다.
핸드폰이 끊긴 자리마다 기다란 여운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.
마음을 쓸어내리듯 빗소리가 조금씩 잠잠해진다.
'다행이다.
조금은 위안이 된다.
다음에 아이가 오면, 오늘 기다린 배 이상의 정성을 담아 따뜻한 상차림을 준비할 것이다.
분명 그래야만 내 마음도 비로소 흡족 해질 테니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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